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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없는 십자가(옮김)
이병선(13)  (Homepage) 2010-09-06 20:14:45, 조회 : 997, 추천 : 237


예수 없는 십자가, 십자가 없는 예수
                                                 - 김두식 교수  

얼마 전 신입생 면접이 끝난 후 동료 교수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이번 면접 질문 중에 "이라크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항목이 포함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을 받은 어느 학생이 "전도가 잘 안 되는
이라크 지역에 하나님이 미군을 통해서라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으키신
전쟁"이라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이라크 전쟁의 본질에 대한 이 황당한 해석
앞에 입을 다물 수 없었던 동료 교수님은 "그 이야기는 누구로부터 배운 것
인지, 아니면 학생 혼자 생각한 것인지" 다시 묻게 되었습니다. 학생의 대답은
"목사님들로부터 배우기도 했고, 자기 생각이기도 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을 통해 복음을 전한다.' 참 대단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침묵>으로 유명한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
(遠藤周作)의 잘 알려지지 않은 소설 <숙적(宿敵)>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천하를 통일하여 전국시대를 마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근습
(近習) 출신으로 조선침략의 선봉을 맡았던 두 명의 장군,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평생에 걸친 숙명적 대결을 소재로
한 이 책은 엔도 슈사쿠가 같은 가톨릭 신자인 고니시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표현한 소설입니다. 명나라 정벌이라는 거창한 명분 아래 조선에게 길을 터줄
것을 요구하며 조선에 상륙한 일본침략군 제1군은 사령관인 고니시 유키나가
뿐만 아니라 병사들 다수도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독실한 불교 신자로 주전파
였던 제2군 사령관 가토 기요마사와는 달리, 고니시 유키나가는 유화파로
분류되며 조선과의 빠른 화친을 원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승승장구
하여 두 달만에 평양성을 점령한 고니시의 군대는 이 결정적 시점에서 약 한
달 동안이나 공격을 멈춘 채 평양성에 칩거하지요. 고니시의 이런 이상한
행동은 상인집안 출신으로 제대로 된 전쟁에 나서본 적이 없는 한계를 드러냄과
동시에  임진왜란에 소극적이었던  그의 입장을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되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고니시는 명나라의 심유경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짜
항복문서를 작성해서 명나라와 일본의 화의를 유도하는, 도요토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극단적 행동에 나서기도 합니다. 십자가 앞세운 고니시,
조선엔 단지 '침략자' 그런 고니시의 초청을 받아 1593년 군종으로 이 땅을 밟은
포르투갈 신부 세스페데스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최초의 서양인 신부가 되었고,
2,000명 이상의 가톨릭 신자 병사들은 세스페데스 신부와 함께 밤마다 미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도요토미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전쟁에 참여하면서도 내심
평화를 원하고 있었던 고니시의 고뇌를 보여주는데 엔도 슈사쿠는 많은 지면을
할애합니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예수회 신부의 전도를 받아
일찍부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의 가톨릭 병사들이 전쟁
터에서 밤마다 미사를 드렸다고 해서, 십자가 군기를 달고 전쟁에 나섰다고 해서,
가토의 군대에 비해 비교적 노략질을 덜 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할렐루야"로
맞아들일 수 있을까요? 작가 김훈은 이순신 장군의 생애를 그린 그의 소설 ‘칼의
노래’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고니시 부대의 대장 깃발은 붉은 비단 장막에
흰색으로 열십자 무늬를 수놓았는데 그 열십자는 고니시가 신봉하는 야소교의
문양이라고 안위(이순신의 부하)는 보고했다. 임진년에 부산에서 평양까지 북상할
때 고니시는 가마 앞에 열십자 무늬의 깃발을 앞세웠다. 나(이순신)는 그 열십자
무늬의 뜻을 안위의 보고를 통해 알았다. 인간의 죄를 누군가가 대신 짊어진다는
것이 야소교의 교리라고, 안위는 포로의 말을 전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적의 내륙 기지에 열십자 무늬의 깃발이 세워진 곳이 적장의 위치이며 그 열십자
깃발 언저리가 전투시 화력을 집중시켜야 할 조준점이라고 안위는 보고했다."
복음은 십자가를 높이 든 군대가 칼을 들고 오락가락한다고 해서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군기를 높이 들든 말든,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은 우리에게
그저 침략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고니시의 십자가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이순신장군 입장에선 쳐부셔야 할 침략자를 상징하는 공격 목표물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칼날을 간신히 피해 일본으로 생환한 고니시는 또
한번의 내전에 휩쓸리게 됩니다. 이번에는 천하를 제패하기 위해 기회를 기다려온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도요토미 가문의 싸움이었습니다.
역사적 결전이었던 세키가하라 전투(關原戰)에서 숙적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의
유지를 배신하여 반대편인 도쿠가와의 동군(東軍)에 서게 되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망해가는 도요토미 가문의 서군(西軍)에 가담하게 되지요. 전투가 도쿠가와 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쫓기는 몸이 된 고니시는 결국 생포되어 처형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생포된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는 당시 일본의 무사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보여줍니다. 할복자살로써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대신, 시가지 곳곳을
끌려 다니며 온갖 수모를 당한 끝에 결국 참수 당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자결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일본
가톨릭은 도쿠가와 막부의 가혹한 박해 속에서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고니시 유키나가의 침략군으로 인해 조선이 복음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일본이 제대로 복음화 된 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그보다 200년
가까이 지난 후, 가난한 이웃과 함께 호흡하며 자기 목숨을 바치려 한 조선의 젊은
지식인과 선교사들에 의해 이 땅에 꽃을 피우게 되었지요. 엔도 슈사쿠의 옹호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중 누구 하나 고니시 유키나가를 신앙인의 모범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고니시의 십자가는 '예수 없는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는 지금 하나님을 대신할 우상으로
미국을 선택한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우리도 고니시 유키나가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고 있습니다. 이라크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투병을 보내야 한다는
부끄러운 주장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들의 눈에는 파병으로 인해 이슬람권 각지에
흩어진 우리 선교사들이 겪게 될 어려움 따위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저는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 기독교가 이런 무지막지한 주전론자의 입장에 서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지막지한 주전론에 휩싸인 우리 기독교 이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바로 미국입니다. 주일 저녁, 제가 기독교 방송을
틀 때마다 빠짐없이 듣게 되는 어느 목사님의 설교는 그 목사님의 국적을 의심케
될 정도로 미국 이야기가 많습니다. 심지어 몇 주 전에는 "하늘나라 시민권"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까지 그 내용의 상당부분을 미국 예찬에 할애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수준 높은 나라가 미국이에요. 미국은 정치가 경제가 안정되고 교육 수준이
질 좋은, 수준 높고 사회 시설이 좋고 민주주의를 가장 잘 하고 있고 부유하고
힘이 있고. 예를들어 우리 한국인도 그 나라에 가 65세를 넘어 영주권 시민권만
얻으면 매월 600불씩. 다 돈이 한 사람에게, 부부면 1,200불이 공짜로 다 나오는
거예요. 일 하나 안 해도 우리나라에서 평생 지내고 거기 가서 살면 그만 나오는
거예요.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세상에 그렇게 좋을 수 없어요. 아프면 100퍼센트
치료 다 해주지요. 아파트도 공짜로 나오지요. 누가 안 가려고 하겠어요. 전부 다
가려 하는 거예요. 왜? 사회가 그만큼 좋으니까 그러는 거예요." 이어지는 예화도
예외없이 미국 이야기였습니다. 이 정도면 목사님이 기다리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나라'인지 아니면 '아름다운 나라(美國)'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의 마음이 파병 찬성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지난 6월 시청앞에 모였던 애국심에 불타는 교계지도자
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개인비리로 재판을 받고 있는 어느 목사님은 그 날
"남한 좌익단체 소탕과 진멸, 사탄의 정권인 김정일 붕괴, 악의 축 김정일 축출"
등을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김정일은 저 역시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소탕, 진멸,
붕괴, 축출'이 과연 사랑과 평화를 가르치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애용할
만한 말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한에는 수만명의 간첩이 있고 그
뒤에는 김일성 주체사상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는 전교조, 그리고 수십 개의 좌익
단체가 있다"는 그 분의 상황인식도 놀라웠습니다. 그 날 어느 교회 성가대가 부른
'전우여 잘 자라', '용진가' 등은 거의 엽기적인 수준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어디 성가대가 부를 노래인지요. 그러나 이 모든것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그 자리에 모인 그 분들의 얼굴, 바로 그 얼굴 자체였습니다. 그 날 그 자리에
앉아있던 분들은 대부분 1970년대와 1980년대에도 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분들
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땅에
떨어졌던 그 시절 저에게 가르쳐 준 유일한 '사회복음(?)'이 있었다면 그것은 로마서
13장이었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로 시작되는 로마서 13장
만큼이나 우리 교회에서 악용된 성경구절도 없을 겁니다. 만병통치약 같은 이 말씀
하나로 젊은이의 양심을 교회 울타리 안에 가두는데 성공했던 그 분들 바로 그들이
시청 앞 단상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공산당이 용납될 때 참다운 민주주의가
될 것이다'라는 발언을 해명하라"고 당당히 외치고 있었습니다. 16년전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니 기독교인이라면 전두환이 설사 악한 권력이라도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던 그 분들에게 그동안 도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요. 박정희,
전두환 같은 군인 출신 독재자는 '위에 있는 권세'가 될 수 있지만, 노무현 같은 서민
출신 대통령은 '위에 있는 권세'가 될 수 없는 것일까요. 저는 일관성을 잃어버린 이
분들을 향해, 소설가 조성기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야훼의 밤」의 주인공 성민의
한 마디를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척척 합리화시키기를 잘합니까?" 평화의 왕 예수는 십자군 상징이 아니다
모든 것을 자기 편한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합리화할 수 있는 이들의 노골적인
욕심은 오늘의 한국 교회를 이해하는 두 번째 열쇠입니다. 욕심에 가득 찬 이들은
불륜이 탄로날까봐 베란다에 매달려 있다가 힘이 모자라 추락사한 목사의 죽음을
과로사로 둔갑시키기고, 교회 세습이 문제되면 "세습이라는 표현이 잘못되었으니
그런 표현을 쓰지 말라"는 동문서답식 공격으로 논의의 초점을 흐리기도 합니다.
이런 오류들을 지적하는 이들을 향해서는 "너희들의 비판 때문에 전도의 문이
닫힌다."며 역공을 가하기도 합니다. 욕심에 가득 찬 이 분들의 얼굴에서 우리는
더 이상 예수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교권자들의 해석을 통해
만들어진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복음서 속의 생명력이 펄펄 넘치는 그 분을
찾을 수 없습니다. 크리스마스 때마다 교회는 향락으로 물든 세상을 향해 '예수
없는 크리스마스'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손가락질합니다. 그러나 이젠 그 손가락을
우리에게 돌려야 할 때입니다. 문제는 산타클로스가 대체해 버린 예수님에게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사라져버린 크리스마스'보다 몇 배나 더 위험한 것은 '예수가
사라져버린 교회'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 오른뺨을
때리는 자에게 왼뺨도 돌려대라고 하신 예수님,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
늘 세리, 창녀들과 동행하셨던 예수님, 칼을 가진 자는 다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담당하신 예수님, 나에게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알려주신 그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예수 없는 십자가'가 전쟁터에
힘차게 휘날리고 있는 동안, 교회에는 '십자가 없는 예수님'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군기에 달려 전쟁터로 나가버렸기 때문에, 이제 교회는 마음 놓고 '십자가
없는 예수님', '영광의 예수님', '우리에게 물질의 축복만 내리시는 예수님'을 좇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가짜 예수님이 교회를 지키는 동안, 우리 예수님은
다시 로마로 돌아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버리고 온 십자가를 다시 지기 위해 로마로
가시는 예수님에게 우리는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쿼바디스 도미네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

김두식 / 한동대 교수, 변호사 http://www.newsnjoy.co.kr/pag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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